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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대학살 기념관
현지어 명칭: 남경대학살 기념관(南京大屠杀纪念馆)
전화번호: 025-8661-2230
오픈시간: 08:30 ~ 16:30
휴무일: 월요일
입장료: 무료
전화번호: 025-8661-2230
오픈시간: 08:30 ~ 16:30
휴무일: 월요일
입장료: 무료
1. 남경 대학살이란?
1937년 7월 일본은 노구교(盧溝橋)사변을 빌미로 중일 전쟁을 시작한다. 먼저 천진을 점령한 일본은 이어서 계속 남하하기 시작하였고, 3개월만인 그해 11월 12일 상해를 점령한다. 남경에 있던 장개석 정부는 11월 20일 사천성 중경(重慶)으로 피난을 하게된다. 남경에 남아있던 15만 명의 중국군대는 남경을 수비하게 되었고, 일본군은 10만의 병력으로 이를 공격하게 된다. 12월 초에 일본군은 남경의 외곽을 점령하게 되고, 남경 시내에 대해 선무활동을 펴서 투항을 권유하나, 중국 수비대는 대포로써 대답하여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인다. 12월 10일 새벽 3시에 일본군은 남경시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재차 남경의 수비대에 투항을 권유하나 굽히지 않자 드디어 12시에 남경 총공격 명령을 내린다. 12월 12일 오후, 남경수비대장 당생지(唐生智)는 장개석의 명령을 받아 "본대는 포위망을 뚫고, 일부는 장강을 건너 탈출하라"는 지시를 수비대에 내린다. 이 명령은 결국 가장 중요한 도시전투에서 조직적인 저항도 못하는 동시에 안전한 후퇴도 못하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와서, 결국 대부분이 일본군에 포로가 되어 집단처형을 당하였다. 12월 13일 오전, 일본군은 남경시내에 부대별로 입성하였고, 대학살의 서막을 올리게 되었다. 일본군의 남경대학살이라는 만행은 이미 치밀한 사전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중국 수도에서의 대학살을 통해 공포감을 조성하여 일본군을 두려워하게 한다'는 심리적인 우위를 차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의 일본군 화중총사령관은 "남경은 중국의 수도로 남경을 점령한 것은 국제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필히 상세한 계획을 세워 행동에 옮김으로써 일본군의 위상을 높이고 중국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이 지침에 따라서 남경의 13여 군데에서 거의 동시에 학살이 저질러졌으며, 사망자수가 30만에 달하는 전대미문의 만행이었다. 일본군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학살하였으며, 어느곳에서는 "100명 먼저 죽이기 내기"도 벌어졌다고 한다. 그외 생매장, 영아 죽이기, 부녀자 강간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2. 남경대학살 기념관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 공화국 설립 이후, 남경대학살의 만행을 기억하기 위해서 남경에 기념관을 만들었으며, 매년 12월 13일 남경대학살에 대한 언론홍보를 통해 전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남경대학살 기념관은 남경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3개의 위령비가 기념관 마당에 있고, 강동문(江東門) 학살지의 유골을 모아놓은 기념실, 일본군국주의 침략사 전시실 및 최근에 지은 일본군 만행 전시실등 3개의 전시실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일본군 만행 전시실은 상세한 역사적 증거물(사진, 일본군 출신들의 일기, 당시 남경거주 외국인들의 기록)을 분류, 전시해 놓아서 중국정부가 남경 대학살에 대해 철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경대학살 기념관 전시실에서는 중국정부의 이같은 입장을 다음과 같이 "結語-맺는말"로써 나타내고 있다. "다시는 역사의 비극을 되풀이 하지말자. 나라가 약해지면 또다시 치욕을 당할 수 밖에 없으니 절대로 과거와 같이 낙후되지 말고,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하자." 3. 노구교(盧溝橋) 사건 노구교는 북경의 서남쪽 15㎞에 위치한 다리로서 일본 군국주의의 중국침략에 구실을 제공해 주는 역사적인 곳이다. 여기서 일본군은 자신의 군인 1명이 실종되었다는 억지를 주장하면서 중일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